개신교와 가톨릭은 무엇을 두고 갈라섰나 — 500년 신학 논쟁 7가지

면죄부부터 이신칭의·성찬론·성모신심·고해성사·성경 정경·교황 무류성까지, 500년 전 개신교와 가톨릭을 실제로 갈라놓은 쟁점들입니다. 다만 이건 '신이 존재하는가'를 두고 다툰 적이 없습니다. 신의 존재와 그리스도, 성경의 권위를 이미 전제한 두 진영이 그 위에서 해석과 제도를 다툰 것입니다. 그 구분이 이 카드의 핵심입니다.

주제: 교회 비판, 난제·반론, 역사·사료, 의심

먼저 목록 하나를 정정해야 합니다. 십자군 전쟁은 사실 이 목록에 낄 수 없습니다. 십자군은 1095~1291년의 일이고, 종교개혁은 1517년에 시작됩니다. 개신교라는 진영 자체가 존재하기 200년도 더 전에 십자군은 이미 끝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건 '개신교와 가톨릭의 논쟁'이 아니라 '분열 이전 라틴 기독교 전체의 역사'이고, 규모와 논리 문제는 이 사이트의 다른 카드(교회가 저지른 일들은 신이 없다는 증거인가)에서 이미 다뤘습니다. 여기서는 실제로 두 진영을 갈라놓은 쟁점들을 봅니다.

1515년,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 재건축 자금과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가 진 빚(푸거 가문 대출)을 갚기 위해 면죄부 판매를 승인하는 교서를 냈습니다. 도미니코회 수사 요한 테첼이 독일 10개 도시를 돌며 이를 팔았고, '동전이 궤짝에 떨어져 짤랑거리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오른다'는 말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판매에 격분한 아우구스티노회 수사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 논제를 붙였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점이 됩니다.

루터의 핵심 주장은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이신칭의) 이루어지며 면죄부처럼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건 가톨릭 교회 자신도 이 판매 방식을 결국 문제로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1563년 마지막 회기에서 면죄부를 얻는 과정의 '모든 부당한 이득'을 없애라고 선언했고, 1567년 교황 비오 5세는 면죄부 취득에 금전을 결부시키는 것 자체를 전면 금지했습니다. 다만 교리 자체 —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를 통해 죄로 인한 잠벌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개념 — 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고, 개신교는 이 틀 자체가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봅니다.

면죄부보다 더 근본적인 균열은 '구원이 어떻게 이뤄지는가'였습니다. 루터는 로마서를 근거로 인간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봤고, 선행은 그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1547년 '의화(義化)에 관한 교령'에서 이를 정면으로 반박해, 은총이 모든 단계에서 필요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도 함께 협력해야 하며 믿음은 구원의 '시작이자 뿌리'일 뿐 전부는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특히 9번째 준칙(canon)은 '은총에 인간의 협력이 전혀 필요 없다'는 식의 '오직 믿음' 이해를 파문 대상으로 못 박았습니다. 야고보서 2장 24절('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을 어떻게 읽을지가 지금도 두 진영을 가르는 가장 근본적인 지점입니다.

성모신심에서 가톨릭은 신에게만 드리는 흠숭(라트리아)과 성인에게 드리는 공경(둘리아)을 구분하고, 마리아에게는 그중 가장 높은 '특별공경(하이퍼둘리아)'을 드린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간극은 종교개혁 이후에도 계속 벌어졌습니다. 무염시태 교의는 1854년, 성모 몸소 승천 교의는 1950년에야 확정됐습니다 — 둘 다 개신교가 이미 갈라선 지 300년도 더 지난 뒤입니다. 개신교의 '오직 성경' 원칙에서 보면 성경에 직접 근거가 없는 이 교의들은 후대에 만들어진 전통일 뿐이고, 로사리오 반복 기도나 '하늘의 모후' 같은 호칭이 실제 신자들 사이에서는 흠숭과 공경의 경계를 흐린다는 우려도 따라붙습니다.

고해성사에서 가톨릭은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요한복음 20:23)라고 한 말을 사제의 사죄권 근거로 봅니다. 이미 종교개혁 전인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모든 신자에게 연 1회 사제 앞 고해를 의무화했고, 고해 내용을 누설한 사제는 파문된다는 '고해의 봉인'도 이때 공식화됐습니다. 개신교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디모데전서 2:5)라는 구절을 들어 사제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하느님께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가톨릭의 답은, 그리스도가 '엄밀한 의미의 유일한 중보자'라는 건 인정하되 사제는 별개의 중보자가 아니라 그 유일한 중보를 전달하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찬에 대한 이해차는 종교개혁 진영 내부에서조차 하나로 못 모아졌다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에서 루터와 츠빙글리는 14개 조항에 합의하고도, 딱 하나 '이것은 내 몸이다'(마태복음 26:26)를 문자 그대로 볼지를 두고 갈라섰습니다. 루터는 빵과 포도주 '안에, 함께, 아래에'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있다고 봤고, 츠빙글리는 상징적 기념이라고 봤습니다. 가톨릭은 1551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빵과 포도주의 실체 전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뀐다는 '실체변화(transubstantiation)' 교리를 공식화하고, 이를 부정하는 쪽을 파문 대상으로 선언했습니다. 즉 이 쟁점은 가톨릭 대 개신교 구도만이 아니라, 종교개혁가들끼리도 끝내 하나로 합의하지 못한 문제였습니다.

심지어 '성경이 몇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조차 합의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은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토빗기·유딧기·마카베오상하 등을 포함한 구약 46권을 정경으로 확정했는데, 이는 393~419년 히포·카르타고 공의회의 목록을 재확인한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1534년 자신의 독일어 성경에서 이 책들을 신·구약 사이 '외경'란으로 옮겼고, 후대 개신교 성경은 아예 빼서 구약 39권만 남겼습니다. 그래서 지금 서점에서 파는 개신교 성경과 가톨릭 성경은 표지 안 목차부터 다릅니다.

교황직 자체의 근거도 논쟁거리입니다. 가톨릭은 마태복음 16장 18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구절에서 베드로 자신이 그 '반석'이며, 로마 주교가 그 지위를 계승한다고 봅니다. 개신교는 원어의 언어유희(베드로/petros와 반석/petra)를 근거로, 반석은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 또는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고 읽습니다. 이 지위가 실제로 얼마나 안정적이었는지도 논쟁거리인데, 1378~1417년 서방 교회 대분열 때는 로마·아비뇽·피사 세 곳에서 동시에 교황을 자처하는 인물이 나와 서로를 파문했고, 이 혼란은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가 세 주장을 모두 정리하고 마르티노 5세를 새로 선출하고 나서야 끝났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의 언어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놀라울 만큼 격렬했습니다. 루터는 1537년 「슈말칼덴 조항」에서 '교황은 참으로 적그리스도다'라고 썼고, 1646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로마의 교황은... 그 적그리스도, 죄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라고 명시했습니다. 칼뱅, 크랜머, 낙스도 같은 표현을 썼습니다. 이후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목자이신 영원한 자」에서 교황이 '엄숙한 정의'(ex cathedra) 형식으로 신앙과 도덕에 관해 선언할 때 오류가 없다고 정의했고, 이를 받아들일 수 없던 독일어권 일부 신자들은 '구가톨릭교회'로 갈라져 나갔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개신교단은 신앙고백에서 '적그리스도' 표현을 삭제하거나 완화했지만, '오직 성경'과 '만인사제직' 원칙에서 성경 위에 서는 단일한 인간적 해석 권위 자체는 여전히 근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서방 교회(가톨릭-개신교) 내부의 분열만 다뤘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먼저 갈라진 축이 하나 더 있습니다. 1054년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하며 확정된 동서 대분열(Great Schism)로, 이때 갈라져 나온 동방정교회는 지금도 가톨릭·개신교와 나란히 세 번째 큰 갈래를 이룹니다. 정교회가 강조하는 지점은 서방과 결이 다릅니다. 신경(니케아 신조)에 서방이 나중에 추가한 '필리오퀘(Filioque,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한다는 구절)'를 정교회는 인정하지 않고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발한다고 봅니다. 구원도 죄의 대가를 치르는 법정적 틀보다,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해 점진적으로 신의 본성에 참여해간다는 '신화(theosis, 신격화)' 개념으로 설명하는 편입니다. 신에 대해서도 '이것이 신이다'라고 정의하기보다 '신은 이것이 아니다'를 하나씩 걷어내는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 전통이 강하고, 로마 교황의 수위권도 인정하지 않으며(각 지역 교회가 독립적으로 자치), 사제의 결혼도 허용합니다. 즉 '기독교 내부 논쟁'을 가톨릭 대 개신교 구도로만 보면 실제로는 세 갈래 중 두 갈래만 보는 셈입니다.

이 일곱 쟁점 모두에서 놓치면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이건 '신이 있는가'를 두고 다툰 적이 없습니다. 루터도, 테첼도, 츠빙글리도, 트리엔트 공의회도, 동서 교회도 모두 신의 존재와 그리스도의 부활, 성경의 권위를 이미 전제한 채 그 위에서 해석과 제도를 다퉜습니다. 두 심장내과 의사가 치료 프로토콜을 두고 격렬히 싸운다고 해서 심장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 것처럼, 두 신학 진영이 성경 구절 하나를 두고 500년째 다툰다는 사실은 그 구절이 가리키는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양쪽이 이렇게까지 정교하게 성경과 역사 문헌을 근거로 삼아 다툰다는 사실 자체가, 둘 다 그 대상을 진지하게 실재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교회끼리도 못 정했다, 그러므로 신은 없다'는 전제에서 결론으로 가는 다리 자체가 없는 주장입니다. 정교회를 포함한 세 전통의 공통점과 차이를 더 정리한 내용은 이 사이트의 '기독교 세 전통 비교' 카드에서 이어집니다.

항목별로 보기

  • 1517년 루터의 95개조 논제 [확인됨] — 면죄부 판매에 대한 항의로 시작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됐습니다.
  • 테첼의 면죄부 판매와 그 유명한 말 [논쟁 중] — '동전이 궤짝에 떨어져 짤랑거리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오른다.' 정확한 문구의 출처는 종교개혁 진영의 기록에 의존하는 부분이 있어 일부 역사가는 신중하게 인용합니다.
  • 1567년 비오 5세의 면죄부 금전 거래 전면 금지 [확인됨] — 트리엔트 공의회(1563)의 결정에 따른 후속 조치로, 판매 관행 자체는 가톨릭 교회도 폐기했습니다.
  • 1547년 트리엔트 '의화에 관한 교령' — 이신칭의 단죄 [확인됨] — 은총과 인간 자유의지의 협력을 강조하며 '오직 믿음'만으로 충분하다는 이해를 파문 대상으로 규정했습니다.
  •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 — 성찬론 합의 실패 [확인됨] — 루터와 츠빙글리는 14개 조항에 합의했지만 성찬의 실제 임재 여부만은 끝내 합의하지 못했습니다. 개신교 내부 분열이지 가톨릭-개신교 구도가 아닙니다.
  • 1551년 트리엔트 — 실체변화(transubstantiation) 교리 공식화 [확인됨] — 이를 부정하는 이들을 파문 대상으로 선언했습니다.
  • 무염시태(1854)·성모 몸소 승천(1950) 교의 [확인됨] — 둘 다 종교개혁(1517) 이후 300년 이상 지나 확정됐습니다.
  •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고해 의무화·봉인 규정 [확인됨] — 종교개혁보다 300년 앞선 결정으로, 개신교 분리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 구약 46권(가톨릭) vs 39권(개신교) 성경 정경 차이 [확인됨] — 가톨릭은 1546년 트리엔트에서 히포·카르타고 공의회의 목록을 재확인했고, 루터는 1534년 독일어 성경에서 해당 책들을 '외경'으로 분리했습니다.
  • 마태복음 16:18 '반석'이 누구인가 [논쟁 중] — 가톨릭은 베드로 자신, 개신교는 그의 신앙고백 또는 그리스도 자신으로 읽습니다. 교황직 전체의 성경적 근거를 둘러싼 가장 근본적인 해석 차이입니다.
  • 1378~1417년 서방 교회 대분열 — 최대 3명의 동시 교황 [확인됨] — 로마·아비뇽·피사에서 각자 교황을 자처하며 서로 파문했습니다.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가 셋 다 정리하고 마르티노 5세를 새로 선출하며 끝났습니다.
  • 루터의 1537년 「슈말칼덴 조항」 — '교황은 적그리스도' [확인됨] — 칼뱅·크랜머·낙스 등 종교개혁 주요 인물들도 같은 표현을 썼습니다.
  • 1646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적그리스도' 명시 [확인됨] — '로마의 교황은... 그 적그리스도, 죄의 사람, 멸망의 아들.'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단은 이 표현을 삭제하거나 완화했습니다.
  • 1870년 교황 무류성 정의(제1차 바티칸 공의회) [확인됨] — 정의 직후 이를 거부한 독일어권 신자들이 '구가톨릭교회'로 갈라져 나갔습니다.

출처